제 3 호 꿈을 좇는 사람들
꿈을 좇는 사람들 202010321@sangmyung.kr편집장 주유라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고, 그래서 관둬야겠다 싶으면 꼭 가까워지는 꿈이 당신에게 있는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빛이 난다고들 한다. 강렬한 열망으로 꿈을 좇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꼭 시련과 풍파가 함께 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르윈은 자신이 꼭 이루고 싶은 그 무엇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을 겪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포크송 가수를 꿈꾸는 르윈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르윈은 아주 작은 가게에서 적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포크송 가수이다. 그런 르윈은 유명한 포크송 가수가 되고자 유명 소속사 사장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추운 겨울에 먼 여정을 떠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포스터에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고양이는 단지 귀여움이나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 정도를 담당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영화를 보면 고양이를 영화에 영리하게 이용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다. 광고에 아기나 동물을 넣으면 효과가 좋다는 말이 떠올라서다. 물론 고양이의 등장에 애묘인의 가슴은 뛴다. 하지만 고양이를 물건처럼 갖다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딱딱한 의자에 앉은 기분을 느낀다. 고양이를 이용한 작품을 보는 것은 숨돌리고 쉬었다 가기에 좋지만, 어딘가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어깨 근육과 척추와 엉덩이뼈 곳곳에 단단한 힘이 들어간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의 고양이는 다른 작품에서의 고양이들과 조금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 고양이는 고양이의 역할을 해낸다. 고양이답게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져오거나, 날렵한 몸으로 뛰어다니다가 말랑한 몸으로 르윈의 품에 안겨있기를 반복한다. 여기까지 고양이의 역할은 귀엽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하며 예측 불가하게 구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양이에게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르윈은 우연히 남의 집고양이 한 마리를 떠맡게 되고, 고양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고양이는 잊을 만하면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잡으면 사라지고 버리면 등장하는 것이다. 몇 킬로미터를 걸어 고향을 찾아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의 포스터가 작중에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 채 형태를 바꿔가며 르윈의 마음을 은근히 흔들어댄다. 르윈에게는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가 있지만, 르윈은 곧 그 고양이를 닮은 암컷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그 고양이를 버리자 다리 다친 고양이가 또다시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그리고 처음에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는 다시 르윈에게 돌아온다. 르윈은 끊임없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창밖에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이 잃어버린 고양이라 착각하고 잡아 온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았다며 기뻐하지만, 그 고양이는 사실 잃어버린 고양이를 닮은 다른 고양이었다. 르윈은 그 사실을 알고도 고양이를 챙긴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꼭 껴안고 지하철을 타고다니는 르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르윈에게 게이 같다고 조롱한다. 르윈은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고양이를 들고 다닌다. 어떤 책임감, 생명 존중, 사명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있으니까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에게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같이 있게 된 고양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왜 내게 눈이 달렸는지 의심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르윈은 포크송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먼 길을 뚫고 유명한 소속사의 대표에게 노래를 들려주러 갔다. 돌아온 말은 상업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몸 뉠 곳을 향해 돌아가는 길에 르윈의 모습은 만신창이다. 피곤함, 무기력함, 버거움, 서러움이 중력처럼 그를 붙잡고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긴다. 그때 르윈은 고양이를 버리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 고양이의 갸우뚱한 표정을 잊지 못하리란 것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르윈의 처지에서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과분했을 것이다. 르윈에게는 돈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죽거나 말거나, 어차피 우연히 주운 길고양이였으니 마음 쓸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르윈의 마음은 편치 않다. 르윈이 잃어버린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길쭉하게 늘이고는 “야옹”하고 운다. 돌아온 고양이를 보며 르윈과 관객은 이상한 감정이 든다. 놀랍고 허무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서 다행이기도 하다. 르윈은 다시 작은 포크송 카페의 무대에 올라 노래한다. 다시 원점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르윈은 지난한 길을 견뎠고 꼴통 같은 자신의 추함을 견뎠다. 거지 같은 생활과 추운 바람과 무엇하나 풀리지 않는 일을 견디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견디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는데도 견딘 것이다. 르윈이 그 모든 지리멸렬함을 거쳐 다시 작은 무대에서 포크송을 부를 때 르윈의 눈빛은 누구보다 많이 빛난다. 르윈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포크송을 떠날 수 없었다. 포크송을 때려 치려고 마음먹어봤자,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오는 고양이처럼 포크송은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르윈에게 고양이가, 또는 포크송이 어떻게든 르윈의 곁으로 돌아왔듯이, 열렬히 원하는 그 무엇은 다양한 모양으로 변신해가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열렬히 무언가를 원하다 보면, 그것이 내 신체 부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부풀리기 전에 그저 글을 매일 쓸 때,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전에 그저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가 바로 그저 그 꿈을 묵묵히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포크송은 르윈으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래하다 벌컥 서럽고 화가 나도 다음날이면 노래했고, 퇴짜를 맞고 와서도 노래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르윈의 곁에는 여전히 포크송이 있다. 모든 것이 르윈을 바닥으로, 바닥으로 무너뜨려도 르윈의 포크송은 아무런 표정 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돌고 돌아 다시 포크송이다. 문득 모든 고양이가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고양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고단한 하루였어.” 꿈을 좇는 르윈도 거리를 헤맨 고양이도 모두 그저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간다. 제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깊은 단잠을 잘 것이다. 다시 돌아간 일상이 고작 서러운 날의 연속일지라도 멈출 수 없다. 날이 밝으면 기지개를 켜고 어제보다 개운한 새 하루를 보낼지도 모르니 말이다. 고양이로 태어난 고양이는 고양이의 삶을 살아낼 뿐이다. 르윈에게 고양이는 마치 열렬히 닿고 싶어도 닿기 어려운 꿈과 같은 존재였다. 만날 듯싶으면 멀어지고, 그래서 포기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 품 안에 들어오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꿈은 당신으로부터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놓을 수 없이 열렬한 꿈이 있다면, 분명 그 꿈 때문에 가끔은 추해지고 지치는 날이 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부르게 되는 포크송에는, 진하게 빛나는 눈빛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제 운명을 알고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꿈은 분명 당신의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꿈을 꾸고 노래하는 당신의 눈빛이 더욱 빛나게 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 3 호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202210316@sangmyung.kr 수습기자 정지은 철학이란 무엇일까.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영향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선생님의 첫 수업은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와 내용의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숙제가 있었는지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해 장난식으로 친구들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받는 학생들이 반마다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첫 수업 시간부터 졸면 안 된다는 나만의 철칙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접해왔던 교과서 중심의 수업이 아닌 처음 들어보는 철학적 내용의 수업에 당황했는지,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수업을 들으면서 점점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빠지게 되었다. 그저 선생님이 좋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따라 독서 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각자 느낀 점을 공유하며 이에 대한 발표 자료와 보고서를 쓰는 활동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철학에 대해 일면식조차 없었던 나였기에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반복하여 읽다 보니 소크라테스에 대해 점점 관심이 생겼고 곱씹어 생각할수록 새로운 사상과 생각들이 등장하면서 흥미를 느꼈다. 부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가 추구하는 진리와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어김없이 고등학교 선생님을 따라 나 또한 소크라테스의 팬이 되었다. 그 덕분에 목표를 다지고 나만의 삶을 그려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 그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학교에서 사회탐구를 선택한 학우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분명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 소프로니스쿠스와 산파인 어머니 파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소피스트, 쉽게 말해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칭하며 자신을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날마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오류와 모순을 드러내어 무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로 고발했고 그는 결국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플라톤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은 스무 살에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철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는 직전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는 아테네에 학원을 짓고 연구에 매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만의 어법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기에 어디서부터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생각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 그의 사상들 무지에 대한 자각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유명해진 이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 말은 그리스 잠언으로 델피 신전에 새겨진 문구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신탁을 통해 깨닫게 되었고, 의미를 알게 된 후 자신의 삶을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전념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란 대체 무엇일까. 덕을 지식이라 여긴 소크라테스를 생각해 보면 진리와 지식에 대한 무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에게도 지식을 가르친 적이 없고 그저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는 자신이 얼마나 지식을 알지 못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알음이 얼마나 얕은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의 결론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던 중, 자신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처음 이 부분을 보고 ‘그래, 인정하지 않기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똑똑한 사람이었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신탁을 인정한 것이었다. 고로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큰 무지는 스스로에 대한 무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인정하게 된 이유를 듣고 생각이 짧았다고 느끼며 나의 무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산파법,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산파법은 문답을 주고받는 가운데 상대의 막연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참되고 바른 개념으로 이끌어 내도록 하는 방법이다. 아이를 낳을 때, 아이를 받고 산모를 도와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산파의 역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무지(無知)를 깨닫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요시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는 스스로를 자신 어머니의 직업에 비유하여 영혼의 산파라고 자처하여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이끌었다. 소크라테스는 용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무지를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성찰적인 태도를 기를 수 있게 도왔다. 단순히 지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이성의 기능까지 강조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여러 대화편을 보면, 그는 한 용어의 개념을 가지고 오랜 시간 질문과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상대방이 정확히 그 개념이 무엇인지에 관해 물을 때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는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이 혼자 깊이 생각하고 그들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용기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변론하며 재판과 판결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후 제자들과 그의 친구인 크리톤은 그를 감옥 밖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설령 악법이라 할지라도 시민들이 정해둔 법에 복종하는 것이 사회와의 약속,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며 탈옥 권유를 거절한다. 분명 판결과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으로 인도하는 현실에 수긍한 것이다. ‘변명’이라는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대는 것, 혹은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변론하고 대화하는 것이 주 내용이기는 하나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대범함과 용기가 잘 나타난다는 점에서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용기’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고 도는 시대, 우리도 소크라테스처럼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에 관심을 집중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에 대한 진리, 철학적인 탐구에 집중했다. 사물에 대한 탐구보다는 우리 주변, 인간의 특성에 조금 더 집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함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의 의미, 사유하는 삶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특히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명심하고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여긴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다룰 줄 아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무지에 대한 자각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다. 어째서 몇 세기가 지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소크라테스가 살아왔던 시대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상황 자체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아테네 사람들은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고, 현대 사회의 모습도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돈, 권력을 중요시하며 그것이 학벌이 되고, 그것이 사회적 지위가 된다. 특히나 교육에서의 모습 더욱 그러하다. 아테네에서 자신이 똑똑하고 진리를 깨달았다며 스승임을 자처하는 소피스트들은 젊은이와 정치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비싼 수업료를 받고 그들에게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수단으로서의 말재주만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유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묻고 답하며 정직함이란 무엇인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레 소크라테스의 팬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떠올려 보면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배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의 배움을 살펴보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그것에 관해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르는 게 생기면 질문하고, 생각하고, 궁금증을 푸는 것은 분명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내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이 남들에게 밝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용기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나 또한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언제 질문을 해야 할지 타이밍만 노리다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개인의 용기도 중요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을 시간을 끄는 사람, 모르는 게 있는 멍청한 사람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가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처럼, 질문하는 사람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대단한 사람, 모르는 것을 배워나가기 위해 용기를 낸 현명한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당연한’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소피스트들처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모르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 채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교육의 방향과 사회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향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질 세상을 기대해 보는 바이다. <참고문헌> 플라톤(1999), 『소크라테스의 변명』, 문예출판사. 소크라테스, 두산백과, 2022.08.08.,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4187&cid=40942&categoryId=33469>
제 3 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202010189@sangmyung.kr 정기자 장아현 우리 사회에서는 이해(理解)가 필요하다. 이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는 타인의 상황을 보며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사정을 잘 헤아렸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나눌 때 이해한다는 말은 그리 어렵지 않게 뱉지만,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하여 내가 아닌 존재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쇼핑백과 지우개 때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친구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강서구에 위치한 ‘ㄷ’직업재활센터에 방문하였다. 떠올려보면 그때는 그저 친구 손에 이끌려서 갔던 것 같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가벼운 마음으로 말이다. 도착하니 창고 같은 곳에 넓은 책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넓은 책상을 둘러싼 의자에 많은 사람이 앉아 제각각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담당자분은 우리도 그 의자에 앉게 하고 간단하게 쇼핑백 접는 방법을 설명해주신 후, 우리가 이제 쇼핑백을 접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쇼핑백만 하염없이 접었다. 쇼핑백을 다 접자, 담당자분은 지우개 포장하는 법을 알려주셨고 또 우리는 한참 동안 지우개 포장을 하였다. 이렇게 같은 일을 계속하니, 슬슬 ‘이게 왜 봉사지? 그냥 일을 대신 해주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친구와 나는 그새 손에 익어버린 일감을 처리하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원래라면 돈 받고 해야 하는 부업 아니야? -그러게, 쇼핑백 접고 지우개 포장하는 게 왜 봉사인 걸까? 그렇게 우리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지녔다. 처음에는 소심한 성격 탓에 묻기를 포기하였지만, 결국 봉사의 정체성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생겨서 나는 조심스레 담당자분께 여쭈었다. 이에 담당자분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아주 친절하게 해주셨다. -학생들과 함께 앉아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장애를 지닌 분들이에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요. 설령 일자리를 구했다고 하여도, 한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죠. 그게 이 센터의 설립 이유예요. 센터는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모두 할 수 있을 정도 난이도의 일감을 외부 업체로부터 의뢰받아요. 그렇게 의뢰받은 일을 하며 급여를 받는 거예요. 장애를 지닌 분들이 일자리 갖고 스스로 돈을 벌도록 해주는 곳이죠. 하지만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만약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 센터에 일감이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그럼 그분들도 일자리를 잃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가 계속 쇼핑백을 접고, 지우개를 포장한 것이었다. 그제야 뒤늦게 내가 한 봉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어르신분들의 거동을 도와드리는 것, 도시의 쓰레기를 줍는 것 등의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행위만을 생각했다. 한 번도 그런 어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봉사를 하고 있음에도 직업재활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이며, 그곳이 어떤 것을 필요로 할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떠한 봉사활동인지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아내지 못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 활동의 ‘쇼핑백’과 ‘지우개’는 그저 어떤 이들의 어려움을 함께 공유한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봉사활동인지 고민하는 과정 속에는 오로지 단순노동을 반복하는 나의 상황만이 있었다. 이 경험으로 타인의 구별과 정립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진정 깊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보내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 선물 받은 책 <그래도 괜찮은 하루>는 청각장애를 지닌 구경선 그림작가의 수필이었다. 그때 한참 다양한 에세이를 읽고 수필이라는 장르에 질려버린 터라, 흔한 교훈을 전달하는 내용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흥미가 떨어졌었다. 그렇게 한동안 책상 위에만 두고 읽기를 미뤄두었다가 한참 후 보게 된 그 책에서, 내가 몸소 배운 깨달음이 있는 곳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귀가 안 들리는 구작가와 그녀가 지닌 허술한 이력서는 모두에게 거절만 당할 뿐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가치를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은, 일자리의 의미를 일깨워줬던 장애인직업재활센터의 봉사활동을 떠오르게 했다. 책에는 이러한 좌절과 역경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하는 과정이 담겨있었다. 그림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며, 인생을 스스로 재정립하고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구작가는 비교하지 않았기에 행복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며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처음에는 ‘긍정적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은 그만뒀다.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은 내심 행복을 느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편협한 나의 전제가 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다시 진정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느꼈다. 구작가의 토끼 캐릭터 ‘베니’ [사진 출처: instagram.com/hallogugu] 구작가는 청각장애를 가졌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한계를 만났다. 장애는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는 것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중 구작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스스로의 ‘가치’였다. 구작가를 원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코로나 이후 장애인 고용률이 다시 한번 하락하였다. 장애인 구직급여 신청현황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2020년 코로나 확산 이후 일평균 100명에 가까운 장애인이 일자리를 잃고 있는 셈이다. 그간 장애인 일자리의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음에도, 현재까지도 장애인 고용률은 34.6%밖에 못 미치고 있다. 제도개선과 예산 증가 등의 노력에도 정작 실제 고용률은 낮아진 상황이다. 물론 팬데믹 상황은 모든 것을 악화시켰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취약계층 등 상대적으로 더 큰 어려움과 변화를 겪는 이들이 존재하였다. 대개 위기란 것은 약한 것에 더 강하게 닥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팬데믹 상황, 그전에도 어려웠었다. 그간 충분히 이해받지 못해왔던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 어리석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다른 ‘낯선’ 존재로 여긴다. -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 우리네 삶은 어렵다. 또 특정 사람들에게 유독 특정한 어려움이 찾아온다. 장애를 지닌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바로 그 사람을 본인과 가깝게 여기지 않아서일 것이다. 무언가를 진정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 만든 더불어 사는 삶이야말로 모든 이의 ‘나’를 더욱 ‘나’로 만들 것이다. 결국, 이 세상 허물을 모두 벗기면 모든 사람은 같은 크기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양종곤(2022), TV 속에만 있는 '우영우'…5년짜리 정책도 무색한 장애인 고용, 서울신문, 2022.07.25. <https://www.sedaily.com/NewsView/268NS67GEB>
제 3 호 먹고 살기 힘든 요즘 세상
먹고 살기 힘든 요즘 세상 201710846@sangmyung.kr 정기자 임지혁 [1]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올해 6월의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의 같은 달과 비교했을 때 6% 상승했고, 이는 IMF 시기인 1998년 이래 처음 기록한 수치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의 임금 또한 인상되었다면 정상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식할 수 있겠지만 같은 기간 공무원 임금은 1.4% 높아졌을 뿐이고, 최저임금은 그나마 5.1% 상승했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가난해졌고, 고로 소비력이 낮아졌다. 모교 학식의 가격이 이제는 6,000원이어서 비싸다고 느껴지지만 이마저도 학교 밖에서는 어렵게나마 맥도날드 빅맥 세트를 먹을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주식 및 금융 시장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인다. 코스피 수치는 작년 2021년 7월 5일 3,293을 기록했지만 2022년의 같은 날에는 약 30% 낮아져 2,336이 되었다. 국내 외화보유액은 환율 방어를 위해 사용되어서 2021년 4,631억 달러에서 올해 6월에는 4,383억 달러로 감소하였지만 7월 5일 지금의 시점에서 원 달러 환율은 1,299원으로 1년 새 150원 이상 상승하였다. 그 이유는 국제적인 다발적인 위기와 인플레이션은 물론이고,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한미의 금리가 1.75로 같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금리를 조정하기에는 국내 부동산 문제, 대출 문제들이 엮여서 복잡한 문제이다. 금융 당국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문제이겠다. 어렵다. 가깝게는 리먼 브라더스, 우리 사회에 상처를 준 IMF,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일 쇼크 시대를 경험한 우리 사회이지만 일선의 담당자가 분투하는 가운데 뚜렷한 전략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20일 현 경제 상황에 대해 “이거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방도는 없습니다”라고 답변했으며 취임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날 즈음, 6월 말부터 한국갤럽, 리얼미터 등 다수의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데드크로스를 경험하고 있다. 여당은 물가 및 민생안정 특위를 결성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논의된 것은 부동산 문제나 종부세 기준 완화, 영끌족 등 ‘보편적인’ 물가 및 민생안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경제위기대응특위를 구성했지만 전체적인 당 차원의 내부적인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이번의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금리와 물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으로 몰리고 있지만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지금만의 일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을 자살 문제, 88만원 세대, 노동 문제, 페미니즘 문제 등 우리 스스로가 살아가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예전에 유행했던 ‘헬조선’이 아무래도 이런 문제점들을 통칭하는 단어였을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분명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잠재하고 있다. 가령, 지난 4월에는 간호사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요지의 문화제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원래는 간호사들의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는 문제를 취재하고 도심 각지에서의 노동계의 시위 등, 노동 문제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려 할 의도였다. 그곳에서 만났던 경기도 ㅇ병원의 조 간호사님은 처음에는 간호계의 노동 환경의 문제점, 가령 인력이 부족하여 양질의 의료 서비스의 제공이 어렵거나 간호사 개개인의 화장실을 갈 시간조차 없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점차 대화의 주제가 바뀌며 요즘 육아의 어려움, 정치권에 대한 실망 등 사회 전체적인 내용으로 확장되었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2000년대 이후로 줄곧 들었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들. 이마저도 아직 주유소의 평균 기름값이 2000원을 돌파하기 이전의 일이다. [2] 어느 날 문득 길상사에 올랐다. 맑고 향기롭게, 법정스님과 대원각의 김영한, 백석과 박헌영. 언뜻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얽힌 장소이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아닌 법정스님의 만년필을 구경하기 위함이다. 법정 스님께서는 만년필을 즐겨 사용하셔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에만 급급해서 자연의 섭리마저 무시한 우리들에게 이 책에 나오는 법정스님의 일화는 우리를 너무도 부끄럽게 만든다. 이 책에 따르면 한 번은 도쿄대학에 유학중이시던 스님께서 법정스님이 좋아하시는 촉이 가는 만년필을 사오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그 만년필을 고맙게 소중히 쓰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스님께서 파리에 가셨더니 그곳에 똑같은 만년필이 잔뜩 있어서 촉이 가는 만년필을 하나 더 사오셨더니 처음 가졌던 필기구에 대한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져 버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나중 산 것을 아는 스님께 드리고 나니 비로소 처음의 그 감정이 회복되셨다는 것이다. 삼선교의 사거리에서 북쪽 길을 따라 오르면 길상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7월의 한여름이었다. 북악의 선선한 산 공기가 반가웠다. 그 곳의 어느 한 건물에 들어서면 법정 스님의 유품이 정돈된 곳이 있다. 유리 너머로 바라본 법정 스님의 만년필은 분명 프랑스 D사의 것이었다. 칠(漆)로 마감된 긴 몸통과 특유의 긴 길이의 클립, 그리고 다소 평평하게 길게 빠진 펜촉은 분명 40여년 전 D사가 만들었던 만년필이었다. 아마 최고급의 부띠크(boutique) 매장에 전시되었을 프랑스제 만년필, 그러나 본래 법정 스님의 만년필은 독일의 몽블랑(Montblanc)에서 만든 만년필로 알려졌다. 몽블랑은 오늘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 값 비싼 만년필을 제작하는, 그야말로 현대 최고의 만년필 제조사이다. 그래서인지 ‘법정 스님께서 쓰시는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우리 사회는 수없이 많은 곡해를 하였다. 가령 무소유를 주창하신 스님께서 ‘몽블랑 149 만년필’만큼은 소유하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면서 몽블랑이라는 회사의 명예를 드높이고, 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에 빗대어 펜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스님께서 몽블랑을 쓰셨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범부(凡夫)의 눈에 비친 만년필이, 그리고 그것을 즐겨 사용하신 멋쟁이 스님의 뜻이 곡해되는 것은 마음에 성치 않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그 만년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내걸기를 주저한다. 그렇기에 당신께서 만년필을 즐겨 쓰셨고, 그 흔적이 만년필에 아름답게 남아있다는 이야기만을 이곳에 남기고 싶다. [3] 길상사에서 나오자 다시 현실과 마주한다. 올해 초 대통령 내외의 방문으로 논란이 되었던 나폴레옹 빵집, 그곳에서 맛있어 보이는 빵을 하나 찾았지만 가격표에 차마 지갑을 꺼내지 못하고 발길을 뒤로했다. 어려움은 여전히 실존했다. 당국과 정치권은 오늘날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우리당도 잘하네요 계속 이렇게해야” 라거나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라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서는 오늘날의 중첩된 어려움들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하원 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양안 위기가 고조될 때 대통령이 휴가를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다. 어두운 시대이다. 마주한 작은 전쟁들 속에서 큰 전쟁을 우려하고 있고, 물가 상승 속에서 우리들의 실질 소비력은 낮아지고 있다. 새로이 날아오른 국산 전투기와 신형 이지스 군함이 우리를 지켜줄 수는 있겠지만 이것들은 만약의 가능성에 대비한 보험일 뿐이고, 정치-경제적인 실질의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런 고민들을 잠시 접어두고선, 오랜만에 보았던 멋들어진 만년필을 떠올리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걷나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그늘막 속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부산외고 1학년 정승익(1998), [학생문예 - 산문] '산에는 꽃이피네'를 읽고, 부산일보, 1998.10.17.,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81017000554>
제 3 호 축구…좋아하세요?
축구…좋아하세요? 202110483@sangmyung.kr 수습기자 양현준 4년에 한 번 열리는 FIFA 월드컵은 전 세계가 열광하는 지상 최고의 축제이다. 여러 스포츠 종목들과 비교하였을 때에 시청자 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만큼 최대 규모의 대회이다. 유럽부터 남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스포츠 경기 중 대개 시청률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남자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이다. 그러나 현재 남자축구 국가대표팀 경기가 아닌 각 나라별 축구 리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과거에 비해 떨어져 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와 관심을 끌고 있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제외하면, 유럽 5대 축구리그 중 나머지 4개 축구리그에 대한 관심은 지속해서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는 현재 10~20대가 과거 세대보다 스포츠 자체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2017년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 시청자 수는 5,800만 명이었다. 이에 비해 미국 프로야구 MLB 월드시리즈 결승전 시청자 수는 3,800만 명, 미국 프로농구 NBA 챔피언 결정전 시청자 수는 3,200만 명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는 MLB와 NBA 모두 오랜 인기와 역사를 가진 스포츠이기에 꽤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래도 아직 UEFA 챔피언스리그 축구 결승전의 시청자 수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리그 오브 레전드(LOL), 즉 e스포츠는 젊은 세대가 주 시청층이기에 미래에는 축구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왜 젊은 세대들은 스포츠에 무관심해진 걸까. 빠르고 간결한 젊은 세대들 현재 젊은 세대는 무언가 한 가지를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소개해주는 유튜브 영상을 본다면, 영상을 본 후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는 사람보다 결말까지 포함된 짧은 줄거리 영상만 10분에서 20분만 보고 끝내는 사람들이 현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넷플릭스나 유튜브 영상을 보아도 배속해서 보거나 10초 스킵 등을 통해 재미없는 장면을 넘기며 보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유튜브에 Shorts라는 형태의 1분 미만의 영상이 등장한 이유도 유튜브가 젊은 세대들이 비교적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인 만큼 이러한 경향성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현시대에는 스포츠보다 더 재밌고 더 즐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e스포츠다.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축구의 차이점 e스포츠란, Electronic Sports의 줄임말로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따위를 통해서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지는 게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피파온라인4 등이 크게 유행하고 있고 서구권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뿐만 아니라 포트나이트, 도타 등 다양한 e스포츠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는 연기된 상태이지만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 배틀그라운드모바일, 피파온라인4, 하스스톤, 스트리트파이터, 아레나오브발러(왕자영요), 도타2 등이 정식 e스포츠 종목으로 채택될 만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고 시장 규모 또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e스포츠가 축구와 달리 젊은 세대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e스포츠인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축구를 비교해보았을 때, 세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유행이 빠르게 바뀐다. 축구 역시 전술적인 유행이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패치에 비하면 아주 늦게 바뀌는 편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는 매 시즌마다 새로운 아이템 등을 만들고, 매주 업데이트를 진행하여 챔피언을 출시하고, 성능을 하향 또는 상향하여, 단순하거나 지지부진한 흐름이 오래갈 수 없도록 한다. 두 번째, 접근성이 좋다. 축구가 대중적인 스포츠가 된 이유 중 하나는 공 하나만 있어도 모두가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축구를 하기 위해 장소를 섭외하고 인원을 모으는 일이 동호회 등이 아닌 이상 쉽지 않다. 그러나 e스포츠는 컴퓨터 하나만 있어도 즐길 수 있기에 축구보다 접근성이 훨씬 좋다. 게다가 길을 조금만 걸어도 흔하게 보이는 게 PC방이다. 세 번째, 매 순간 눈을 뗄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 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로 인해 빠른 흐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축구 경기 중 매 순간 집중하여 볼 만큼 재밌는 경기는 손에 꼽는 편이다. 골이 나오지 않고 수비만 하는 지루한 경기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지루한 경기도 있을 수 있으나 게임 특성상 한 번에 여러 곳에서 변수가 발생할 수 있기에 비교적 지루함이 덜 할 수 있다. 우리가 알던 축구가 사라질 수 있다, 축구 룰 이렇게 바뀐다? 어느 한 해설위원이 유튜브 채널에서 골대 크기를 늘리자는 둥 축구도 농구처럼 3점 슛 즉, 먼 거리에서 들어간 중거리골은 2점을 주는 것은 어떠냐며 재밌을 것 같다며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농담 삼아 했던 얘기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축구계는 젊은 세대가 축구를 보지 않아 점차 인기가 떨어지는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FIFA에서도 위기라고 느꼈는지 시대 흐름에 맞게 룰을 개정하여 이를 FIFA U-19 유스 토너먼트 대회에서 실험 중이다. 룰 개정안은 다음과 같다. 전 후반 시간을 30분으로 단축함과 동시에, 농구와 같이 공이 경기장을 나갈 때마다 시간을 멈춘다. 몇몇 통계에 따르면 현재 실제 경기 시간은 60분 내외라고 한다. 이러한 룰의 변화는 축구 경기를 더욱더 함축적이고 체력적으로도 더 재밌는 경기가 가능해지게한다. 다음은 무제한 교체이다. 무제한으로 선수를 교체하여 선수들의 체력 안배와 전술적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 활용 폭이 넓은 팀에 유리할 수 있다는 단점 역시 존재한다. 또 하나는 공이 터치라인 밖으로 나갈 시 스로인 즉, 손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킥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는 풋살과 유사한 형태이다. 다양한 세트피스가 추가되는 효과가 있으며 피지컬과 킥이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측면만 공략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경고를 받으면 필드 밖으로 5분간 퇴장하는 규칙이다. 거친 플레이를 제재하고, 시간 지연 방지에 효과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수가 빠져 있는 팀은 선수가 돌아올 때까지 볼을 돌릴 우려가 있다. 이러한 룰의 변화가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아 재밌겠다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반면 단점들과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거부감을 내비치는 사람 역시 존재한다. 축구의 부흥을 위한 슈퍼리그 프로젝트 작년 스페인 라 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인 플로렌티노 페레스 로드리게스(Florentino Pérez Rodríguez)가 슈퍼리그 창설을 선언하면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슈퍼리그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과 스페인 라 리가 소속 그리고 세리에 A 소속의 빅클럽이라 불리는 각 나라의 구단들끼리 승강제 없는 하나의 리그를 창설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매주 이슈가 될만한 경기가 펼쳐져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며, 중계권과 광고의 수요 등이 커져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슈퍼리그 창설을 추진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관중을 받지 못하면서 많은 축구 클럽들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슈퍼리그 참여시, 창단 12개 팀은 4,000억 가량의 금액을 받을 수 있으며 승강제가 없어 안정적인 큰 수익을 낼 수 있기에 재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축구 산업 자체의 부정적인 전망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이가 어릴수록 축구를 보는 인원이 크게 줄고 있기에 이는 축구 산업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축구 산업을 부흥시키려는 의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연고 스포츠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현지 팬들, 선수들의 극심한 반대로 속해 있던 클럽들이 탈퇴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OTT 플랫폼의 2차 창작물, 스포츠와 미디어의 결합 앞으로 축구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존 팬들의 니즈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팬들의 유입까지 이끌어야 한다. 어쩌면 OTT 플랫폼의 2차 창작물이 이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OTT 플랫폼이란 영화, TV 방영 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현재 여러 OTT 플랫폼에서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내놓고 있다. 스포츠 특성상 위대한 선수와 팀 그리고 기록 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기에 이는 좋은 스토리 라인으로 이어진다. 2018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잉글랜드 2부리그로 강등된 이야기를 담은 <죽어도 선덜랜드>, 2022년 왓챠 다큐멘터리 아스널 FC의 무패우승 과정을 담은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 등 귀감을 주는 다큐멘터리가 많이 등장하였다. 기존 팬들은 본인이 모르고 있었던 내용을 알게 될 수도,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다.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지고 본 사람들은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 축구, 스포츠가 가지는 낭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팬이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축구…좋아하세요? “축구가 망해간다”라는 말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축구는 여전히 인기가 많고, 각 구단은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축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걱정처럼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계속하여 받지 못하게 된다면 50년 뒤에도 100년 뒤에도 지금 같은 위치에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직은 조금 이를 수 있지만, 축구계의 부흥을 위해 앞서 언급한 축구 룰 개정, 슈퍼리그 창설 등 획기적인 논의들이 계속되고 있다. 한 가지만은 명심했으면 좋겠다. 축구가 견제해야 할 대상은 다른 스포츠뿐만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모든 콘텐츠임을. 나는 한 축구 팬으로서, 축구 인기가 지금보다 많아져 축구를 보며 느끼는 여러 감정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들은 “축구…좋아하세요?” <참고문헌> 박민제(2020), “443000000명이 보는 E스포츠, 한국은 축구로 치면 브라질 급”, 중앙일보, 2020. 1. 3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93010#home> 이스타TV, [방구석토크] 시간단축!! 무한교체!! FIFA가 생각하는 룰 변경안은?, 2021. 7. 19., <https://www.youtube.com/watch?v=FcOm0Auric4>
제 3 호 Burnout Syndrome (燒盡)
Burnout Syndrome (燒盡) 202110353@sangmyung.kr 정기자 송지민 “ … 저는 잘하는 게 없어요.” “좋아하는 것들에는 뭐가 있나요?” “제가 좋아하는 건...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잘하냐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을까?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고 해도 떠올려낼 수 있을까.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잘하는 것이 있긴 한 걸까?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는 뭐가 있을까. 맛있는 음식과 쉬는 것이라 대답하기에는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개성도 없고 재미없는 건조한 사람 같달 까나. 그렇게 보이긴 싫은데...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문득,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항상 나눠주던 설문지가 생각난다. 나의 취미, 나의 특기, 나의 장래 희망 등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질문이 적힌 설문지 말이다. 그때에는 망설임 없이 적어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나에게 그 설문지를 다시 준다면 나는 그때처럼 써낼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보다 10년은 더 살아,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모든 것들이 딱히 신나지 않고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며, '그 특별하지 않은 것이 결국 나 자신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내려 걸었다.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목적 없이 걷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걷다가 교보문고 간판이 눈에 띄었다. 평소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책을 읽지 않고 있었기에 '이참에 책이나 읽어볼까?'라는 생각으로 교보문고에 들어섰다. 계단을 내려가 교보문고 입구로 들어가니 매우 많은 책이 있었고, 그러한 책들 사이에는 책을 고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리고 그 많은 책 가운데에는 '베스트 셀러' 책들이 진열된 곳이 있었다. 그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진열된 책들을 보고 있자니, 모두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등등... 마치 그곳에 있는 모든 책이 제목만으로도 나에게 '너는 있는 그대로도 멋진 사람이야!',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살짝은 진부하게도 느껴지면서, '왜 이런 비슷한 내용을 말하는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베스트 셀러를 차지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인건가? 모두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건가? 이런저런 궁금증들이 생겼다.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하다. '번 아웃', 1974년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로이덴버거에 의해 과로의 결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진단되었다. '번 아웃'은 탈진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 반면 '번 아웃'은 그 지점에서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는 앤 헬린 피터슨의 책 '요즘 애들'에 나오는 '번 아웃'에 대한 정의이다. 대충 어떤 것인지 감은 오지만,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번 아웃 증후군' 증상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여러 개의 자가 진단 테스트들이 있었고, 훑어보니 대부분 나와 들어맞는 것 같았다. '증후군'이라는 명칭이 붙어 뭔가 대단한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별거 없어 보였다. 모두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문항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번 아웃 증후군’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찾아보고 싶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청년 번 아웃’, ‘20대 번 아웃’과 같은 키워드들을 검색해가며 찾아본 결과, 동아일보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령별 통계를 찾을 수 있었다. 통계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그림 한국인 얼마나 ‘번 아웃(탈진)’ 됐나 출처 : 김재희(2017), 희망 잃어버린 20대, 가장 지친 ‘탈진 세대’, 동아일보, 2017.04.03. 그림 20대의 번 아웃 원인 및 해결 방식 출처 : 김재희(2017), 초중고부터 경쟁의 무한궤도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20대, 동아일보, 2017.04.03. 20~30대가 가장 많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모든 연령대가 비슷한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에너지 저하를 느끼며 몇몇은 탈진 증후군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찾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청소년도, 대학생도, 취업준비생도, 직장인들도 그리고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고충과 내면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이 왜 ‘번 아웃 증후군’을 겪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기에는 너무 어리다. 그래서 해결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두 번째 통계, <번아웃이 됐을 때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면 20대의 ‘번 아웃’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하는 건 음주, 수면, 폭식 등 본능적 욕구 해결. 좋지 않아 보인다. 그 당시의 무료함은 잠시 없앨 수 있겠지만 지속해서 보았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 외에 친구, 연인 등 사람들과의 만남과 여행, 휴학, 휴직 등 장기간의 재충전 기간은 언뜻 보기에 건강한 방식 같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서 힘듦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마음대로 여행을 다닐 수도 없기에 적용할 수 없는 해결방안이다. 휴직 또한 경제적인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므로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결정을 쉽게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취미 활동, 텍스트만 보면 간단해 보인다. 취미 활동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도 있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또한 밖에서도 할 수 있고, 집 안에서도 할 수 있다. 가장 건강하고 나 자신을 계발할 수 있는 즐거운 활동 같아 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취미를 찾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나부터도 내 취미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미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라고 한다. 나는 위 정의에서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문구가 가장 와 닿았다.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마치 내가 잘하는 것을 취미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취미 활동을 시작하려 해도, 내가 잘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포기하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하찮고 귀여운 것들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캐릭터 스탬프나 마스킹 테이프, 놀이동산에서 파는 조그만 반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밤새 몰아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공간에서 편안한 자세로 밤새도록. 또, 비 오는 날에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으며, 마루에서 얇은 이불 하나 덮고는 낮잠을 자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적고 나니까 확실히 멋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취미라고 할 수 있는지도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저러한 것들을 할 때 즐기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별생각 없이 무던하고 잔잔하게 지내던 내가 의욕이 생기고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많은 것이고, 또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잘하는 전문적인 일들을 할 때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며 그것이 취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마음이 편해지는지 생각해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취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지치고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사회는 계속해서 더 빠르게 발전할 것이기에, 그러한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바꿀 수 있다. 더 심한 무력감으로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들기 전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며 그것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보려고 하자. 단번에 무력감과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지쳐가는 시간 틈 사이사이에 우리가 좋아하는 시간을 차곡차곡 넣어보면, 전과는 다른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재희(2017), 희망 잃어버린 20대, 가장 지친 ‘탈진 세대’, 동아일보, 2017.04.03.,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0403/83654657/1> 김재희(2017), 초중고부터 경쟁의 무한궤도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20대, 동아일보, 2017.04.03.,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70403/83654822/1> 정예은(2018), 달리다 멈춰도 괜찮아,청년 번아웃, 덕성여대 신문, 2018.11.26., <http://www.dspres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156>
제 2 호 작은 네모에 담긴 프로파간다
정기자 이선우 fhfgdvd96@naver.com 이 작은 네모는 조선에서 처음에 ‘우초’라 불렸다. 1884년 개화파 정치인 홍영식이 도입한 이것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 우정총국이 폐지됨으로써 불과 한 달도 사용되지 못하고 10년간 잊혔다. 이후 1895년에 우편업무가 재개되면서 이것은 우표라 불리기 시작하며 민간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되었으나 이것은 대한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념우표가 되었다. 어두운 세월이 흘러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이후 처음으로 발행된 보통우표에는 이순신 장군과 이준 열사와 같이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위인들의 초상이 들어갔다. 새로운 나라의 우표에서 더 이상 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얼마 안 가 우표에는 새로운 왕이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한복을 입고 등장한 초대 대통령, 양복을 입고 하야하다 [그림 1]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부터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미협회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독립운동을 이끌어오며 국내와 해외에서 인지도를 쌓았기에 광복 이후 새로운 정부의 유망한 지도자 후보로 주목받았다. 다만 그의 주 활동지역이 미국을 위주로 한 해외였고 외교적 독립운동을 주도했기에 김구를 비롯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보다 민족적 색채가 부족하다는 결점이 존재하였다. 이를 의식한 듯 이승만이 처음으로 등장한 우표인 ‘초대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에는 그가 평소에 즐겨 입던 양복을 입은 모습이 아닌 한복을 입은 모습이 담겨있다. 이 우표가 발행되고 얼마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한복을 입고 등장하였다. 우표뿐 아니라 한국은행에서 최초로 발행한 은행권에도 한복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들어갔다. 이러한 대통령의 이미지는 양복보단 한복이 더 보편적이던 당시 생활상을 고려했을 때 대중들에게 더 친숙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우표와 은행권에 담긴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점차 원래 그의 모습대로 양복을 입은 초상으로 전부 대체되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중 강압적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독재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이후 과거의 정적들이 소멸된 환경에서 새로운 왕으로서 우표에 등장하였다. 그 화룡점정은 1956년에 발행된 ‘대통령 제81회 탄신’ 기념우표이다. 이 우표는 작년에 이미 제80회 탄신 기념우표가 발행되고 뒤이어 발행된 우표로서 당시 관에서 대통령을 찬양하고 선전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해 2번째로 연임한 이승만 대통령을 기념하는 ‘제3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마지막으로 그는 초대 대통령임에도 우표에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였다. 군인 대통령의 시대, 군인과 대통령이 주인공으로 나서다 4.19혁명으로 무너진 제1공화국을 뒤로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제2공화국은 혼란한 정국 속에 1년이 체 못 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전복되었다. 이후 30년 넘게 대한민국은 군인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거쳐야 했다. 그 시대의 시작을 알린 대표적인 자료가 바로 ‘5.16군사혁명’ 기념우표이다. 이 우표는 처음부터 국민과 해외에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알리고 홍보한다는 목표로 군사정변 이후 한 달 뒤인 6월 16일에 발행되었다. 당시 군인 출신인 배덕진 체신부 장관의 명령으로 불과 10일 만에 우정국 실무진과 조폐공사 직원들이 피를 말려가며 발행한 이 우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빠른 처리속도로 탄생한 기념우표였다. 이후 우리나라의 우표에는 군인과 군 관련 행사들을 기념하는 우표들이 수시로 발행되었다. 대표적으로 ‘5.16혁명 제1주년’, ‘9.28수도탈환 제15주년’, ‘예비군의 날 기념’, ‘재향군인의 날 기념’... 등등 박정희가 5.16군사정변 때 혁명공약으로 내건 반공, 경제개발과 관련된 주제보다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념우표가 더 빈번하게 발행되었다. [그림 2] 5.16 군사혁명 기념 우표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 우표에 자주 등장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기념우표뿐 아니라 보통우표에도 초상이 들어간 대통령이며 전두환 대통령에 뒤이어 우리나라 우표에서 2번째로 빈번하게 등장한 인물이다. 한국 우표에 3번째로 많이 등장한 세종대왕은 역대 11종의 우표에 등장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이 들어간 우표는 22종이나 발행되었다. 참고로 이승만 대통령은 그 뒤를 이어 9종의 우표에 등장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은 7년의 재임 기간에 무려 30종의 우표에 등장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기간인 16년에 반도 안 되는 기간에 이렇게 우표에 그가 자주 등장한 이유는 처음에 투표로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국민의 선택으로 당선된 인물이 아니었기에 1980년에 집권한 직후부터 대규모 행사나 퍼레이드, 운동 경기 등을 적극 동원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동시에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리시켰다. 우표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한 홍보성 기념우표들은 거의 전단지 수준으로 많이 발행되어 마침 유행하던 우표수집 붐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판매되었다. 그래서인지 이때 발행된 전두환 기념우표들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액면가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때 우표를 투자의 대상으로 사 모은 사람들은 결국 돈 주고 전단지를 모은 꼴이 된 것이다. [그림 3] 12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 프로파간다와 외화벌이를 한번에? 전두환 정권 이후 대통령이 우표에 등장하는 경우는 취임기념우표와 같이 특정한 경우로 한정되었고 우표를 통한 정부의 프로파간다도 그 정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는 우표가 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특히 과거 공산권 국가들은 프로파간다적인 요소가 다분한 우표들을 대량으로 발행하여 외국의 우표상들에 헐값으로 팔아 선전도 하고 외화도 버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렇게 우표를 외화벌이 수단으로 대량 발행하는 국가들을 ‘우표남발국’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악명 높은 곳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이미 1970년대부터 우표를 외화벌이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얼마나 많은 우표가 발행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우표 수집가들도 공식적인 발행량은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이다. 북한은 한국보다 훨씬 다양한 우표를 빈번하게 발행했는데 대부분 조선노동당의 선전, 선동 목적이 다분한 우표들이다. 이 우표들을 제외하면 거의 해외수출용으로 발행된 우표들로 해외의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 등을 무조건 끌어와서 담은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북한이 영국과 국교를 맺기도 전에 발행된 다이애나비 기념우표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우표들은 보통 수십 톤 단위로 발행되어 해외에 헐값에 풀렸기 때문에 적어도 50년 전에 발행된 희소한 우표가 아니면 전단지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 별로 없다. 북한 우표에서 김일성은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인 1946년에 발행된 ‘8.15해방 1주년’기념우표에서부터 등장한다. 이후 김일성은 북한에서 발행한 우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인물이 되어 1994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우표에 등장하였다. 김정일은 1987년에 발행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기념우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김정일이 우표에 전면 등장하기 2년 전인 1985년에 이미 ‘백두산의 비밀 캠프(밀영)’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이곳은 북한이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출생지라 선전하는 곳으로 사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세습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곳이다. 이는 북한이 이전부터 수많은 ‘혁명사적지’들을 기념우표에 담아 발행했음에도 이 밀영이란 곳은 매우 뒤늦은 198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우표에 등장시켰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듯 북한에서 우표는 세습의 밑밥을 깔아두는 정치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우표라는 이름의 작은 전단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고 말했다. 물론 우표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동시에 왜곡된 정보를 배우게 될 가능성도 생각보다 크다. 우표에는 언제나 그 우표를 발행한 국가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만 담긴다. 당장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국의 우표 수집을 권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 이미지들은 때때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왜곡된 정보를 담기도 한다. 만약 우표만 보고 그 우표를 발행한 국가를 이해한다면 그 어떤 국가에서도 부정적인 면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그 시기에 발행된 우표를 동시에 들여다보면 역사를 더 다양한 차원에서 바라볼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표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성을 내포한 전단지이며 역사의 이면을 들춰보는 좋은 단서가 되어줄 것이다.
제 2 호 ‘비효율의 세계’
정기자 주유라 loveura00@naver.com 우리는 효율의 세계에 살고 있다. ‘효율(效率)’이란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이다. ‘효율-적(效率的)’이란 ‘들인 노력에 비하여 얻는 결과가 큰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비효율의 세계는 큰 이익이나 눈에 띄는 결과를 얻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비효율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효율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효율의 세계란 마음이 따르는 곳을 향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학창 시절 효율적인 학업 생활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 대입이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도 이제 조금 한숨 돌려볼까하는 마음 한켠에는 불안감이 싹튼다. 대학에 들어와도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효율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효율의 세계 안에서 중요한 것은 보람이 아닌 편리함과 실리이다. 우리는 효율의 세계에 익숙하다. 관심이 가는 수업보다는 학점이 잘 나온다는 수업을 택한 적이 있는가? 배우고 싶은 것을 미루고 컴활(컴퓨터활용능력 자격시험)이나 토익 강의를 결제한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효율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효율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마음이 따르는 곳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비효율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빌어 쓸모없는 세상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여름 생일날, 친구들은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다양한 프렌차이즈의 기프티콘을 선물했다. 이제는 관례처럼 굳어진 기프티콘 선물은 편리하다. 밋밋한 생일 축하에 성의를 담을 수 있으며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료와 간식, 심지어는 비싼 과일이나 고급 한우까지, 무엇이든 클릭 몇 번이면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기프티콘과 채팅만으로 쉽게 마음을 전할 수 있으니 우리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한다. 카카오톡, 네이버 등은 선물의 모든 과정을 현대인의 삶에 맞춰 점차 간소화하고 있다. 심지어는 잘나가는 선물을 나이대에 맞게 추천해주니, 이보다 간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쓴 손편지와 얼굴을 마주 보고 건네는 선물이 그리운 까닭은 무엇일까? 얼굴을 마주보고 건네는 손편지와 선물은 기프티콘이 흉내 낼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 소중한 특성 중 첫째는 바로 시간이다. 가벼운 채팅 메시지와 함께 기프티콘을 보내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마음에 드는 편지지와 적당한 볼펜을 골라 책상에 앉을 필요가 없다. 또박또박 바른 글씨체를 쓰려 노력할 일도 없다. 선물을 사러 갈 필요도, 직접 포장할 필요도, 얼굴을 마주 보고 건네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선물 하나를 직접 전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물이 지닌 시간이다. 둘째 특성은 의미이다.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의미를 선물할 수 있다. 내게는 잊히지 않는 선물이 있다. 통에 담긴 아몬드이다. 아몬드 선물을 받은 나는 그것이 건강이나 시력을 위해서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의미가 담긴 아몬드였기 때문이다. 아몬드 선물은 같이 읽었던 책의 캐슈넛 선물을 흉내 낸 것이었다. ‘사생활의 천재들’이라는 책의 한 부분에서 작가는 친구에게 캐슈넛을 선물한다. 작가는 존 버거의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의 한 문장을 인용하며 캐슈넛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사이에 깨문 이 희망들이 넝마인지 새것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밤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새로운 날을 꿈꾸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커피 좀 있나요?” 인용을 마친 작가는 친구에게 말한다. “이 사이에 깨문 희망.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너에게 캐슈넛을 선물해. 네가 밤을 이겨내고 살아남길 바래. 바로 그것 때문에 캐슈넛을 선물해. 네가 피로 가운데서도 너를 확장하길 원해. 바로 그것 때문에 캐슈넛을 선물해. 네가 희망 때문에 생각의 틀을 바꾸길 바래. 그것 때문에 캐슈넛을 선물해. 캐슈넛을 입에 넣고 깨물 때마다 희망을 깨문다고 생각하기를 바래.” 아몬드보다 중요한 것은 아몬드 안에 담긴 의미였다. 상대방은 내게 아몬드를 주었지만 내가 받은 것은 캐슈넛이 될 수도 있었고 동시에 ‘이 사이에 깨문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선물을 통해 시간과 의미를 주고받아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기꺼이 비효율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하고 싶은 의미가 있음을 말이다. 선물에 시간과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까닭은 직접 건네는 선물이 지닌 물성 덕분이다. 선물에는 건네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다. 효율의 세계에서 물성은 환영받기 어렵다. 자리를 차지하거나 유용한 쓸모도 없으니 말이다. 반면 비효율의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성에 열광한다. 그들은 물성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감정의 물성>, 허블, 2019, 205쪽 물성을 지닌 것은 선물만이 아니다.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쓸모있는 물건인지보다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이나 의미가 중요해진다. 얼마 전 나는 지우개를 샀다. 하지만 결코 지우개로 사용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화가의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다. 내 주변에도 수집가가 둘이나 있다. 그들은 만년필이나 우표를 모은다. 그들이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그것들을 용도에 맞게 쓸 때가 아닌 그저 바라볼 때일 것이다. 물건을 수집하고 어루만지는 마음에 효율이나 계산이 끼어들 틈은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을 것 같아’, ‘그냥 좋으니까!’ 이렇게 단순한 마음 안에는 씨앗처럼 단단한 힘이 있다. 비효율의 세계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들인 노력에 비해 큰 결과를 얻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 마케터 김규림은 10년간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다. ‘목요일의 글쓰기’를 시작하고서는 3년 동안 190회가 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계정 ‘6DP’에는 주 6일 정성껏 밑줄그은 종이신문 몇 장이 올라온다.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와닿은 종이신문 기사를 갈무리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탕의 화려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선택지에 솔깃하지 않는다. 단숨에 어마어마한 결과를 바라는 효율의 세계는 잠시 내려놓는다.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건너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말은 아직 내가 하지 못한 말이다. -‘파라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1945년 9월 24일’ 우리를 잡았다. 우리를 감옥에 넣었다. 나를 벽 안으로 너를 벽 밖으로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알면서, 모르면서 자기 안에 감옥을 품고 사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들이. -‘파라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1945년 9월 26일’ 나짐 히크멧, 이난아 옮김.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재인용 효율을 벗어난 세계에서 효율보다 중요한 가치는 보람이다. 보람이란 ‘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좋은 결과나 만족감. 또는 자랑스러움이나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일의 가치’이다.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보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달리는 사람이 승자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효율의 세계를 택하는 것이 항상 정답일까? 효율만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 안에는 감옥이 들어선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효율의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이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비효율의 세계에서 마음이 보내는 소리를 꼭 붙잡는 것이다. 원하는 것, 마음이 끌리는 것을 택해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거나 대단할 필요는 없다. 비효율의 세계는 엉망진창의 결과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환영할 것이다.
제 2 호 불안 속의 자하 고개
편집장 임지혁 201710846@sangmyung.kr 하루는 신발에 몸을 맡기고는 자하의 언덕을 걸어 오른다. 자동차들은 바로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눈앞에 보이는 차도와 인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급격한 경사길을 오르는 것으로도 숨차지만 오늘도 무사히 등교하기 위해서는 발길을 조심해야만 한다. 하루는 자동차에 몸을 맡기고 자하의 언덕을 오른다. 사람들은 차의 바로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차도와 인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급격한 경사길에서의 안전 운전을 위해서 엔진 브레이크 조작은 필수이다. 필자는 지난 주말에 학교에 올랐다. 하루는 직접 걸어서, 그리고 다른 하루는 자동차와 함께였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직접 걸어 올라가도, 혹은 차를 타고 올라가도 사람들의 안전은 위협받았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첫 날, 걸어서 올라가면서는 필자의 바로 옆으로 커다란 버스와 자동차들이 지나간다는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였다. ‘만약 내가 걸어가다 넘어진다면 과연 차에 치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저 차는 나를 치지 않고 지나갈까?’, 그런 두려움으로 정신을 재촉해야만 했다. 종종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는 곳도 있지만 그마저도 약하디 약한 철제 구조물이 스스로만을 지탱할 뿐이며, 언덕 밑의 새검정 교차로에서 캠퍼스 건물까지 차도를 밟지 않고 걸어가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어떨까? 기본적으로는 오르내리면서 큰 불편함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경차였지만 엑셀을 깊숙히 밟으면 언덕을 오르는 데 문제가 없었고, 엔진브레이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언덕을 내리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평일일 때, 그리고 등교가 다시 시작될 때에 우리 상명대 학우들, 그리고 사범대학 부속 학교들의 학생들이 등/하교한다면 어떠했을까?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는 그 길에서 과연 차를 능숙하게 조작해서 무사히 등교할 수 있을까? 혹자는 학교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사진1] 2021년 마을버스 종로 08번 사고 장면 지난 2021년 5월에는 정류장에 정차했던 서대문 8번 마을버스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버스 내부에 승객이 있었고, 충돌하였던 카페도 정상 영업 중이었으므로 아찔한 상황이었다. 혹은 이러한 사고가 발생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비가 오는 날, 혹은 눈이 오는 날에는 언덕길의 버스와 자동차들이 헛바퀴를 굴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의 비율로 중대한 사고, 작은 사고와 사소한 사고가 발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사도 높은 언덕에 학교가 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덕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는 언젠가 큰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작은 노력들을 오늘 찾아보고자 한다. 차도 인도의 명확한 분리 현재의 정문 등굣길은 인도와 차도가 복잡하게 얽힌 구조이다. 예를 들어 제2공학관 방향에서 최대한 인도를 이용해 등교하고자 한다면 부속 초등학교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뒤 경사를 오르다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를 피해서 캠퍼스에 진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의 등굣길은 비효율적이기도 하다. 차도의 좌우 양쪽으로 인도가 비연속적으로 위치하므로 정작 인도 하나의 면적이 협소해지는 우려가 있다. 그리고 협소해짐과 동시에 차도와의 구분이 명확해지지 않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언덕을 오르는 방향의 오른쪽, 문구점과 인쇄소 방면은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으며 그사이에 자동차가 정차된 현황이다. 만약 인도를 하나로 합치고, 인도를 확충한다면 차도와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덕에서의 구간단속 우리 학교의 정문 쪽의 언덕은 어린이보호구역이다. 30km/h로 차량 운행 속도가 제한되며, 실제로 언덕을 내려가는 방향으로 과속 단속 카메라가 위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속 단속 카메라가 무용지물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언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다 카메라 앞, 과속 여부를 판단하는 루프 센서에서만 30km/h의 속도로 감속하는 일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휴일일수록 더더욱 심하다. 이러한 위험은 구간단속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버스 정류장 부근에, 그리고 언덕이 끝나는 세검정 교차로 부근에 단속 카메라를 설치하여서 폐색 구간에 대해 평균 30km/h를 초과하는 속도로 주행한다면 단속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간단속을 통해 구간 내 평균 속도를 낮추고, 과속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버스 정류장의 평탄화 일반적으로 차량이 주차할 때 가장 위험한 곳은 경사진 곳이다. 그래서 운전 교습 시에는 자동 면허는 주차 브레이크를 단단히 체결하여서, 그리고 수동 면허는 여기에 더해 별도의 기어 조작으로 언덕에 주차된 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막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평지에 주차하는 것이다. 상명대학교의 교내 주차장은 모두 안전하고 평탄한 곳에 위치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존재한다. 바로 버스 정류장이다. 시내버스 7016이나 마을버스 종로 08의 경우 교내 정류장이 종점이므로 학교에 5분가량 정차하게 된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5분은 정차와 주차를 구분짓는 시간이기도 하므로 어쩌면 버스 정류장은 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류장은 평지가 아니고, 실제로 상술하였던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교내에서 가장 위험한 주차장인 것이다. 비록 우리들의 캠퍼스를 평탄화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조금만 노력한다면, 버스 정류장 만큼은 어쩌면 평탄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의 부지가 넓지는 않지만 버스가 안전하게 멈춰있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쉽지 않다.’ 위의 이야기를 꺼내자 모 관계자가 꺼낸 말이다. 비용 문제로나, 혹은 법적인 문제로 어렵다는 논지였다. 그렇지만 하나둘 이야기를 꺼낸다면 어떨까? 학생의 시각에서, 그리고 교수자의 시각에서, 교직원의 시각에서 언덕을 바라보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우리들의 지혜가 모여 새로운 작은 원동력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천천히, 하나둘 진보하면서 언젠가는 마음 편히 언덕을 오를 수 있는 날이 되지 않을까?
제 2 호 대학생들의 수면습관에 따른 몸의 변화
정기자 서영훈 seoyh120@naver.com 1. 수면의 중요성 청년취업난이 극심한 시대에 각자 본인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시기로 넘어가는 대학생들이 겪고 있는 현 실정은 각종 고민과 스트레스가 급증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생이 자각하는 생활 스트레스는 경제적 스트레스(29.1%), 성적(26.4%), 취업(24.7%), 이성 관계(8.4%)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각종 스트레스는 종종 수면의 양적 부분인 수면시간과 질적 부분인 수면의 질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하는 불규칙한 수면습관은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생산성을 저하하고, 대인관계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고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은 수면장애 그 자체로도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불안, 집중력 감소, 수면장애 등으로 인한 또 다른 질병에 이환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기본욕구로 활력을 회복하는 수단이 되는 수면을 적당히 취하지 못하면 에너지와 활력을 잃게 된다고 하였고 수면이 불안, 우울, 스트레스 등 정신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2. 아침형 인간 vs 저녁형 인간 두 집단을 비교한 결과, 아침 활동형 집단의 경우 취침 시각은 12시 48분이고 기상 시각은 7시 30분이었고, 저녁 활동형은 취침 시각이 2시 06분 기상 시각이 9시 11분이며, 수면의 양에서는 두 집단 모두 약 6시간 30분으로 집단 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잠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저녁 활동에서 더 길었고 전반적인 수면의 질도 떨어져서 일반적인 수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저녁 활동형은 아침 활동형에 비해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대학 생활의 부적응 정도가 심했다. 즉, 저녁 활동형의 정도가 심할수록 자신감이 부족하고 심신의 건강 상태는 좋지 못하며 주의집중력은 떨어졌다. 반면에 아침 활동형일수록 대학 생활에 만족감과 에너지 및 동기 수준이 높았고 가족 및 사회적 관계가 잘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에서의 적응의 주요 지표인 학업 성취도를 알아보기 위해 총 이수 과목의 평균 학점을 비교했을 때 저녁 활동형의 평균학점이 낮았다. 저녁 활동형이 아침 활동형보다 수면의 질, 심리 행동상의 건강, 대학 생활의 적응 및 학업 수행 등에서 뒤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아침 활동형은 사회, 물리적 환경에서 요구하는 활동 시간대와 자신의 생체 시계에 설정된 활동 시간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저녁 활동형의 경우에는 자신의 수면 일주기 리듬과 일상적으로 부과된 사회적 스케줄 간의 불일치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저녁 활동형은 사회 활동에서 요구하는 기상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수면 리듬에 비해 일찍 잠을 자려고 해도 쉽게 잠들기 힘들고, 이에 따라 수면의 양과 질이 떨어지게 된다. 특히 이들은 주말에 장시간 수면을 취함으로써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말의 늘어난 수면시간과 늦은 기상은 수면 리듬을 무너지게 만든다. 이는 주말 저녁 취침 시간을 더욱 늦어지게 하고 월요일의 기상을 더욱더 힘들게 하여 주중의 피곤을 가중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따라서 아침 활동형에 비해 특히 오전에 경험으로나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더 졸릴 수밖에 없다. 또한 기상 직후 잠에서 덜 깨어난 채 일시적으로 멍한 상태를 경험하는 수면 무력증이 아침 활동형에 비해 길어서 오전 시간의 과제 수행에서 불리하게 된다. 이처럼 저녁 활동형은 자신의 생체 시간과 사회, 환경적 시간 간의 불일치로 자신의 생리적 리듬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는다. 이런 스트레스는 정서적, 행동적, 사회적 부적응과 학업상의 수행을 방해할 수 있다. 저녁 활동형은 학업 성취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저녁 활동형은 자신의 수면 리듬에 비해 일찍 시작되는 강의 또는 시험 시간은 개인의 생리적 또는 기민성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보다 이르기 때문이다. 3. 학과 및 학년 간 수면의 질 변화 대학생들의 수면시간을 살펴보면 취침 시작 시각이 평균적으로 24.39시였고, 기상 시간이 7.65시 정도에 실제 수면시간이 6.91시간 정도였다. 또한 수면 지연시간이 평균 22.64분으로 전체적으로 양호하였다. 학과에 따라서는 비교적 유사한 학과계열인 인문, 사범, 사회 등의 학과계열들은 수면의 질 점수의 평균이 비슷하며 별 차이가 없었으나 공학과 예체능의 학과계열에서 좋지 못한 수면의 질을 보여주었다. 이를 스트레스와 연관 지어 보았을 때 스트레스를 매우 받는다고 응답한 대학생이 예능계열이 37.0%로 자연 공학 계열 17.1%, 인문사회계열이 16.1%보다 월등히 높았다고 결과를 얻었으며, 공학과 예체능 계열의 대학생들은 학과 특성상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수면의 질이 좋지 않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학년 간에는 1학년 < 2학년 < 3학년 < 4학년으로 학년이 높아질수록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수면의 질 점수가 높아져 가고 있다. 이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 등 진로 스트레스가 학년이 높아질수록 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고한 것을 연계해서 보면 학년이 높아질수록 진로 스트레스로 인해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4. 수면 질과 생활패턴의 연관성 흡연, 음주, 카페인 섭취 등 생활패턴도 수면의 질과 연관이 있다. 대학생들의 생활습관과 수면의 질의 경우에는 흡연을 전혀 하지 않는 대학생들이 수면의 질이 좋았지만, 흡연하는 경우에는 수면의 질이 낮았다. 담배의 각종 화학물질이 당장은 기분을 좋게 하더라도 취침 시에 수면의 질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음주의 경우 전혀 마시지 않거나 가끔 마시는 경우는 수면의 질이 좋았으나, 매일 마신다고 응답한 대상자가 수면의 질 점수가 매우 좋지 않게 나타났다. 매일 음주하는 것은 취기에 빨리 잠드는 것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정작 수면 상태에 돌입하였을 때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커피 섭취의 경우도 음주와 유사한 결과를 보였는데 가끔 한 번씩 마시는 것은 수면의 질이 나빠지지 않았지만 매일 마시게 될 경우 수면의 질이 좋지 않게 나타났다. 이는 카페인 음료를 가끔 섭취하는 것보다 매일 섭취할 경우 신체 내의 카페인 분해속도가 카페인의 유입량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육류섭취, 과채류 섭취, 아침 식사에 관해서는 각 빈도별로 통계적 유의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육류섭취와 과채류 섭취, 아침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대학생들만이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양 상태가 불충분할 경우에도 수면의 질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간식 섭취와 운동 빈도는 수면의 질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낮잠 취침의 경우에는 매일 낮잠을 자거나 평소에 낮잠을 자주 자는 경우 야간의 수면의 질이 좋지 않게 나타났다. 5. 우리는 적절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에 부합하기 위해서 많은 시험 및 과제에 짓눌려 있다.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개인의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자신의 마음과 몸이 스스로 얼마나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수면의 진정한 이점을 간과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삶의 스트레스와 압박은 축적되어 삶의 질을 떨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양질의 수면을 통해 삶을 활기차게 하고, 마음과 몸과 영혼을 재건하여 최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적절한 수면은 우리가 당면하는 스트레스와 압박 같은 문제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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